경복궁(景福宮)은 서울 종로구 사직로에 위치한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으로 사적 117호로 지정되었다. 1395년(태조 4)에 창건되어 정궁(正宮)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52년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조선 말기 고종 때 중건되었다.
경복궁의 역사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했다. 『주례(周禮)』의 정치적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예법에 따라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지었다. '경복(景福)'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이외에도 강녕전, 사정전, 근정전, 광화문 등 주요 전각들의 명칭을 지었다. 경복궁은 계속해서 전각이 지어지고 보완되었는데, 세종대에 조선 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1543년(중종 38)과 1553년(명종 8)에는 경복궁에 큰 화재가 발생해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었으나 1554년(명종 9)에 복원되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을 포함한 창덕궁, 창경궁 등 한양 안에 있던 궁궐들이 소실되었다. 피난을 떠났다 한양으로 환궁한 선조는 환궁해 정릉동 행궁(덕수궁)에 머물었고, 광해군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했다. 반면 경복궁은 재정적인 부담으로 오랫동안 복구되지 못하고 폐허로 남아 있었다. 경복궁이 재건된 것은 270여년이 지난 고종대로 흥선대원군의 주도하에 왕권 강화를 목표로 약 7년 동안 이어졌다. 고종이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끝내고 친정을 선언한 이후에는 건청궁과 집옥재, 관문각 등이 조성되었다. 건청궁 옥호루는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운의 장소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했다. 1897년에 대한제국 선포되면서 경운궁이 새 정궁이 되자 경복궁은 정궁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경복궁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했다.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분으로 대부분의 전각들이 훼손되었고, 1926년에는 경복궁의 일부를 철거하고 광화문을 이동시키면서 조선총독부를 세워 경복궁의 경관을 훼손하였다. 이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경복궁 복원공사가 진행되었고,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였으며 흥례문 일원, 침전 권역, 건청궁과 태원전, 그리고 광화문 등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광화문과 주요 전각
광화문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광화(光化)’는 ‘군주에 의한 덕화(德化)’라는 뜻이다. 다른 궁궐의 정문들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2층 누각을 세워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광화문은 아치로 된 세 개의 홍예문(虹霓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에 있는 문은 왕만이 출입할 수 있고, 좌우의 문으로 왕세자와 신하들이 각각 출입했다. 또한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시각을 알리는데 사용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865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사업으로 복원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청사를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고 석축만 남았다. 이후 1968년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된 것이다.
주요 전각
근정전(勤政殿)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이나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궁중연회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근정전의 ‘근정(勤政)’은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라는 뜻으로,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곳이다. 근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다시 낮은 기단을 두고 그 위로 중층으로 올린 건물로 안에서 보면 층 구분이 없는 통층(通層)이다. 근정전 앞마당, 즉 조정(朝廷)은 다른 궁궐의 정전과 같이 박석이 깔려있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으며 조정에는 정1품부터 정9품까지의 품계석을 놓았다.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 기둥에는 4신상과 12지신상을 포함하여 28수 별자리상 등을 조각하였다. 내부 바닥은 전돌을 깔았고, 북쪽 가운데에 왕의 자리인 어좌를 설치하였다. 어좌 뒤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를 놓았고 천장에는 칠조룡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사정전(思政殿)
사정전의 ‘사정(思政)’은 ‘선정을 깊이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왕이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다. 이곳에서 매일 아침 업무 보고와 회의, 경연 등이 이루어졌다. 내부에는 근정전과 같이 왕의 자리인 어좌가 있고, 그 뒤로 왕권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를 놓았다.
강녕전(康寧殿)
강녕전은 교태전과 함께 왕과 왕비가 일상 생활을 하던 침전이다. '강녕(康寧)'은 ‘편안하고 건강하다’라는 뜻이다. 왕은 이곳에서 독서와 휴식 등 일상생활 뿐만 아니라 신하들과 은밀한 정무를 보기도 하였다. 강녕전은 ‘정(井)’자 모양으로 9개의 방을 구성하여 가운데 방은 왕이 사용하고, 주위의 방에서는 상궁이 숙직하였다. 건물 앞에는 넓은 월대가 있고,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는 건물이다.
경회루(慶會樓)
경회루의 '경회(慶會)'는 ‘경사스러운 연회’라는 뜻으로,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 경회루에서는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열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했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작은 누각이었으나 1412년(태종 12)에 연못을 크게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다시 만들었다. 성종과 연산군 대에 수리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고종대에 중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