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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조선후기~19세기 중엽 이후의 역사)

by 셋째돼지 2025. 6. 9.

경희궁(慶熙宮)이 있었던 자리는 원래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이 살았던 곳이다. 그런데 광해군이 인왕산 자락에 인경궁을 짓기 시작할 무렵 정원군의 집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터를 몰수하고 경희궁을 지었다.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되었다.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1760년(영조 36)에 원종의 시호인 ‘공량경덕 인헌정목 장효대왕(恭良敬德 仁憲靖穆 章孝大王)’의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하여 경희궁으로 바꿨다.

경희궁
2020년 경희궁전경,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조선후기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훼손된 창덕궁을 정비하고 창경궁을 건설했다. 또한 1617년(광해군 9) 1월부터는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건설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술인(術人) 김일룡(金馹龍)이 새문동(塞門洞)에 위치한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려 있으니, 이곳에 새로운 궁궐을 지을 것을 권유했다. 이에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을 관가로 들여 궁궐 건설을 단행했다.

광해군일기[중초본]116권, 광해 9년 6월 11일 갑진 2번째기사
새 궁궐을 새문동(塞門洞)에다 건립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였다. 【성지(性智)가 이미 인왕산 아래에다 신궐을 짓게 하고, 술인(術人) 김일룡(金馹龍)이 또 이궁(離宮)을 새문동에다 건립하기를 청하였는데, 바로 정원군(定遠君)의 옛집이다. 왕이 그곳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듣고 드디어 그 집을 빼앗아 관가로 들였는데, 김일룡이 왕의 뜻에 영합하여 이 의논이 있게 된 것이다.

…(중략)】


경복궁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서궐(西闕)'이라고 불렀으며 이후 ‘경덕궁’이란 궁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광해군은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새로 건설된 경덕궁을 사용하지 못했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이 소실되고,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또한 불에 타자 인조는 인목대비를 모시고 경덕궁으로 이어했다. 이후 경덕궁은 여러 왕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는데, 숙종은 경희궁에서 태어나고 승하했으며, 그의 아들인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1829(순조 29)년 10월에 발생한 대화재로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831(순조31)년 에 다시 중건하였고, 1859(철종 10)년부터 11년에 걸쳐 보수 공사를 진행했다.

19세기 중엽 이후

경희궁의 전경(全景)을 그린 <서궐도안(西闕圖案)>을 보면 수많은 전각들이 지형에 맞게 배치되어 있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대부분의 전각들이 경복궁으로 옮겨져 재사용되었다. 숭정전(崇政殿), 회상전, 정심각(正心閣), 사현각(思賢閣), 흥정당 등 주요 전각만 남긴 채 나머지는 모두 헐려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 관사의 건립에 사용되었다. 경희궁 뜰에 깔린 전석(磚石)과 층계석은 광화문 중건에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소유로 넘어가면서 궁궐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다. 당시 경희궁 내 남아있는 전각은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 5채 뿐이었다. 이러한 전각들은 경희궁 안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교사나 임시 소학교 교원양성소로 사용되었다. 이후 경성중학교에 부설된 임시 소학교 교원양성소가 경성사범학교로 인계되면서 숭정전은 1926년 일본계 사찰인 조동종 양본산별원 조계사로 팔려나가 본당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조계사가 혜화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로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숭정전은 동국대학교 법당인 정각원(正覺院)이 되었다. 현재 경희궁 자리에는 새로운 숭정전이 복원되었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기단석 등을 이용해 복원하였다. 또한 흥화문은 1931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지은 절인 박문사(博文寺) 정문으로 옮겨져서 경춘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해방 이후 신라호텔이 들어서자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1988년 경희궁 복원 사업이 시작되면서 다시 경희궁터로 옮겨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원 위치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복원하였다. 이외에도 서울시는 1885년과 1987년 두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경희궁 내 전각을 복원하는 사업을 진행해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