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고구려를 건국한 시조는 '주몽(朱蒙)' 혹은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알려져 있다. 『동명왕편』이나 『삼국유사』에서 고구려 시조의 왕호는 '동명', 이름은 '주몽'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동명성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삼국지』, 『위서』, 『양서』 등과 같은 중국 사료에서는 주몽을 고구려의 시조로, 동명은 부여의 시조라고 구분하고 있다.
주몽(朱蒙)과 동명(東明)
고구려의 시조와 관련된 내용은 장수왕 2년(414)에 건립된 광개토대왕비(廣開土王陵碑)에 일부 전하며, 역시 장수왕 대에 만들어진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銘)에도 건국 신화의 내용이 전해진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건립한 것이고, 모두루묘지는 광개토왕대에 북부여지역에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활약하다가 장수왕대에 죽은 모두루의 무덤으로 5세기 초에 제작되었다. 이들 기록은 모두 5세기대에 고구려인이 남긴 금석문이라는 가치가 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추모왕', 모두루묘지에는 '추모성왕'이라고 기록되었다. '추모(鄒牟)'는 '주몽(朱蒙)'과 동음이표기(同音異表記)이다.
옛적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 : 水神)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聖)스러운 … 이 있었다(5字 不明).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성(城)을 쌓고 도읍(都邑)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해석: 노태돈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주몽 신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및 『동국이상국집』에도 실려 있다.
『삼국사기』권 제13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 …(중략) …"
『삼국유사』권 제1 기이(紀異) 고구려 "≪국사(國史)≫ 「고려본기」에 이른다. 시조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중략) …"
전체적인 줄거리는 대체로 비슷하며 세부적인 내용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부여(東扶餘)의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여인은 " 저는 하백(河伯)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들과 놀다가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가 저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강 인근의 방 안으로 꾀어 사통하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갔다고 꾸짖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謫居]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금와왕은 유화를 궁궐에서 머물게 했다. 그런데 유화의 방으로 햇빛이 들어오더니 유화를 따라다니며 비추었다. 그리고 얼마 후 유화는 잉태했다. 유화의 배는 점점 불렀고, 크기가 닷되 만한 알을 낳았다. 금와왕은 알을 버리라 했다. 그런데 알을 개, 돼지에게 줘도 먹지 않고, 들어 버려도 새와 짐승이 품어주었다. 그래서 도로 유화에게 가져다 주어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그 아이는 골격이 뛰어나고 영특했다. 또한 활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했다. 당시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 하였기에 이름을 주몽이라 지었다. 금와왕에게는 아들이 7명 있었는데, 그 재주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 미치지 못했다. 그 중 맏아들인 대소(帶素)가 왕에게 주몽을 제거하라고 했으나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했다. 주몽은 가장 날쌔고 튼튼한 말에게 일부러 먹이를 적게 줘서 마르게 하고, 비실비실한 말을 잘 먹여 살이 찌도록 했다. 왕은 살찐 말을 타고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금와왕의 아들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헤치려고 모의했다. 이 사실을 안 유화는 주몽에게 떠나라고 일렀다.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와 길을 떠났다. 엄사수(淹㴲水)에 이르렀으나 다리가 없었다. 추격해오는 병사들이 닥칠까 고민하던 주몽은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外孫)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물 위로 물고기와 자라가 올라와 다리를 만들어주었다. 무사히 강을 건넌 주몽은 모둔곡(毛屯谷)에서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默居)를 만났다. 그들에게 각각 극씨(克氏), 중실씨(仲室氏),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씨를 주고 능력을 살펴 각기 일을 맡겼다. 그들과 함께 졸본천 (卒本川)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나라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