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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재 조영석의 생애와 풍속화_<사제첩>

by 셋째돼지 2025. 5. 15.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사대부 화가이다. 우리나라의 문인화는 조영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국 화풍에서 벗어나 독립된 형태를 갖추었다고 평가받을 정도이다. 당대에는 어진을 모사하라는 왕명을 2번이나 받을 정도로 인물화의 제1인자로 인정받았다. 조영석의 작품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직접 보고 그린 풍속화들로 매우 사실적이고 독창적이다.

관아재 조영석, &lt;사제첩&gt; 중 바느질

여인들이 바느질하는 장면을 자세히 관찰해 사생한 작품이다. 꿰매고, 접고, 가위질 하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조영석, <사제첩> 중 바느질의 부분

1. 생애

조영석의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자는 종보(宗甫)이다. 호는 관아재(觀我齋)와 석계산인(石溪山人)이다. 1686년(숙종 12년)에 당시 예빈시 직장(直長, 종 7품)을 지낸 아버지 조해(趙楷)와 어머니 진주(晉州) 강 씨(姜氏) 사이에서 4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관직과 학문

조영석의 집안은 당대 노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 중의 하나인 안동김씨와 혈연 및 학연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처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조영석은 14세가 되던 해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시련을 겪는다. 다행히 맏형인 조영복(趙榮福)이 집안의 대들보 역할을 하면서 형을 아버지처럼 의지했으며, 이희조(李喜朝)의 문하생이 되어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는다. 28세인 171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33세인 1718년에 종 9품 장릉참봉(章陵參奉)에 제수되어 첫 출사를 한다. 그러나 36세 때인 1721년(경종 1) 12월에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면서 스승 이희조는 전라도 영암으로, 형 조영복은 경상도 선산으로 유배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여파가 말단직에 머물러 있던 조영석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았지만 벼슬을 단념하고 은거하였다. 1724년에 경종이 갑자기 죽고 노론의 추대를 받던 영조가 즉위하자 유배 중이던 조영복을 비롯한 노론 대신들이 풀려났다. 조영석도 4년간의 은거생활을 청산하고 한양으로 올라와 조정에 복귀했다. 이후 공릉 참봉, 장원서 별제, 사헌부 감찰, 의금부 도사, 이조 좌랑, 종묘 서령, 제천 현감, 형조 정랑 등 다양한 내직과 현감을 거쳤으며 정 3품 당상관에 올랐다.

왕명을 거부한 일화

조영석은 영조 임금으로부터 선왕인 세조와 숙종의 어진을 모사하라는 명령을 각각 2번이나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관아재는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갖추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화가'라기보다는 '선비'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기예(기술)로 왕을 섬기는 것을 선비의 도리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선비로서의 품위를 잃는 것이라고 여겼다. 첫 번째로 왕명을 거부한 시기는 그가 50세인 1735년으로 당시 의령 현감이 되어 외직으로 나가 있을 때였다. 세조 어진 제작의 감독을 맡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자신은 전문 화원이 아니라며 즉시 상경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파직되고 수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두 번째는 1748년으로 60세가 넘은 나이에 숙종의 어진을 제작하라는 명령을 다시 받았을 때였다. 관아재는 끝까지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추궁을 받을 뻔했으나 영조가 문초하지 말라고 명령하여 겨우 처벌은 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일화는 관아재 조영석의 엄격한 선비 정신과 예술관을 반영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2. 풍속화

조영석의 풍속화는 조선후기 서민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생생하게 묘사하여 이후 조선적인 진경산수와 풍속화가 발전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관아재의 작품들은 당시 중국풍의 관념적인 그림과는 달리 현실에 기반한 사실주의와 인간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미술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사제첩>은 조선 후기 풍속화와 문인화의 경향을 보여주며 이후 김홍도, 신윤복 등의 풍속화 발전에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관아재 조영석 풍속화의 특징 

조영석은 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이나 사람, 동물 등을 관찰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다. 실제로 그는 바느질하는 여인이나 새참을 먹는 농민, 목기 깎기, 마구간에서 일하는 장면, 소와 송아지 등을 담았다. 또한 배경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인물에 집중하는 구도를 선보이기도 하고, 선과 색채도 가볍고 담백한 설채를 사용했다. 이는 당시 중국풍 회화와는 차별화된 조선적 풍속화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시도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주의적인 창작 태도 서민 삶에 대한 깊은 애정과 공감을 반영합니다. 

<사제첩(麝臍帖)>

<사제첩(麝臍帖)>은 조영석의 작품들을 한데 모아 엮은 것으로 작품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이병연의 발문에 근거해 보면 50세(1735년) 이후에 그린 작품들을 후손들이 화첩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바느질, 우유 짜기, 목기 깎기, 작두질, 마동, 마구간, 소, 젓 먹는 송아지, 새참, 닭, 병아리, 개, 두꺼비와 산나리, 메추라기 등과 같이 서민들의 평범한 생활 모습이나 우리에게 익숙한 동물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해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수묵으로 빠르게 그려낸 스케치부터 세밀한 필선과 채색을 가한 예까지 작품의 소재와 기법이 매우 다양하다. 종이의 재질과 크기도 다양하고 초고, 미완성, 완성작이 혼재되어 있어 작품 수준은 일정하지 않다. 화첩 표지 왼쪽에는 사향노루의 배꼽이라는 뜻의 '사제(麝臍)'가 적혀 있다. 사향노루는 사냥꾼에게 잡히면 자신의 배꼽에서 나오는 향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배꼽을 물어뜯는다고 한다. 그래서 오른쪽에는 '남에게 보이지 말라, 만약 어길 시 내 자손이 아니다(勿示人 犯者非吾子孫)'라는 경고문을 써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