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덕수궁_조선후기와 대한제국시기

by 셋째돼지 2025. 6. 7.

덕수궁(德壽宮)의 옛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경운궁은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황궁(皇宮)이 되어 대한제국의 중심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1907년(광무 11)에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어 경운궁에 갇혀 생활하게 되면서 덕수궁으로 개칭되었다. 덕수궁은 일본과 세계열강들의 위협 속에서 나라를 지키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덕수궁 전경, 출처:국가유산청

조선후기

경운궁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로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던 곳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궐들이 모두 불에 타버리자 1593년(선조 26)부터 임시 궁궐로 사용되어 정릉동 행궁(行宮)으로 불렸다. 경운궁이 있던 정릉동은 많은 종실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선조가 장기간 체류하면서 점차 인접한 종친들의 집을 수용해 경역을 확장했다.

전란 이후 궁궐의 복구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결국 선조는 1608년(선조 41)에 행궁(경운궁)에서 승하했으며, 광해군이 행궁의 서청(西廳)에서 즉위했다. 광해군은 정릉동 행궁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내려 정식 궁궐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부터 왕의 거처였던 경운궁은 이곳에서 인목대비가 유폐되면서 '서궁'으로 격하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경운궁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한 후 선조가 거처하던 침전인 즉조당과 석어당(昔御堂)만 제외하고 경운궁을 월산대군의 후손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경운궁은 즉조당과 석어당, 그리고 왕비의 토지를 관리하는 궁방인 명례궁 등만 남은 상태로 200여 년 동안 비어있었다.

대한제국시기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계기는 1895년(고종 32)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경운궁으로 환궁하기 위해 궁궐의 수리를 명하였다. 고종이 인조반정 이후 오랫동안 비어 있던 경운궁을 선택한 것은 경운궁 근처에 외국 공사관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보수공사가 모두 끝나자 1897년(고종 34) 2월 20일 경운궁으로 이어했다. 1897년 8월 고종은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한 뒤 환구단(圜丘壇)에서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이후 황궁에 걸맞게 규모를 확장하고 격식을 높이기 위한 공사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때 궁궐 내에 서양식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석조전도 1900년에 착공하였는데, 영국인 하딩(G.R. Harding)이 설계한 것으로 1910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 고종은 다른 궁으로 이어하지 않고 경운궁을 중건했는데 이때 중건된 전각은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함녕전, 준명당(濬明堂), 흠문각(欽文閣), 영복당(永福堂), 함유재(咸有齋), 함희당, 양이재, 중화문 등이다.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은 본래 2층 구조로 건설되었으나 화재로 소실된 이후 단층 구조로 재건되었다. 또한 원래 덕수궁의 정문이었던 인화문 대신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수리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1907년(광무 11) 7월 20일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순종은 경운궁의 돈덕전(惇德殿)에서 즉위식을 행하고 태황제가 된 고종을 경운궁에 남겨둔 채 황후, 황태자와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태황제 고종의 궁호를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의미로 ‘덕수’(德壽)라고 정하였다.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후 경운궁은 고종의 궁호를 따서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처럼 대한제국의 중심 무대였던 경운궁은 국왕이 국정활동을 펼치는 궁궐로서의 기능보다 퇴위당한 고종의 거처가 되면서 궁의 권위가 상실되었다. 1911년 덕수궁 즉조당에서 고종의 후비인 엄비(嚴妃)가 세상을 떠났으며, 고종은 강제퇴위 당한 후 13년 동안 덕수궁 함녕전에 거처하다가 1919년 1월 승하하였다. 고종의 승하 이후 덕수궁 궁역은 잘려 나가고 전각도 헐리는 등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5년 12월 덕수궁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사무처가 되었으며, 1946년 3월에는 석조전에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어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후 덕수궁의 복원이 꾸준히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