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백제는 고대 한반도의 중서남부에 위치했으며 수도는 위례성이다. 위례성은 오늘날의 서울 송파구 일대의 풍납토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제는 부여에서 고구려를 거쳐 남하한 이주민과 일찍부터 한강 하류 유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마한(馬韓)의 소국(小國)이 결합하여 세운 국가이다. 백제의 건국 과정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백제시조를 온조 혹은 비류로 들고 있으며, 『삼국사기』 「지리지」나 중국의 정사(正史), 『속일본기(續日本紀)』 등에서는 동명(東明), 우태(優台), 구태(仇台), 도모(都慕) 등을 언급했다.
2. 온조 신화
백제의 다양한 건국 설화 가운데에 가장 널리 알려진 내용은 『삼국사기(三國史記)』권 제23 백제 본기에 전하는 시조 온조왕이다.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或云, 朱蒙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의 시조는 온조(溫祚)이다. 온조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 즉, 주몽(朱蒙)이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나와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부여 왕의 둘째 딸과 결혼했다.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이고 둘째는 온조(溫祚)이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았던 아들 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여 명 신하들과 남쪽으로 떠났다. 한산(漢山)에 이르자 온조는 열 명의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을 도읍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했다. 비류는 의견을 따르지 않고 미추홀(彌雛忽)에 가서 살았다. 이때가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이었다. 비류가 선택한 미추홀의 땅은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안하게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의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고 후회하다가 죽었다. 비류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 백성들이 올 때에 기뻐하였다고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함께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씨(氏)로 삼았다.
3. 석촌동 고분군
이상 살펴본 백제의 건국 설화는 부여 및 고구려의 건국 설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백제가 건국하자마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는 기록이나 538년(성왕 16) 백제가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었던 점 등에서도 이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백제의 도읍인 위례성 주변인 석촌동 일대에서 발견되는 백제 왕실의 무덤들이 고구려와 비슷한 돌무지무덤이라는 점에서도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석촌동 고분군은 예로부터 돌이 많은 마을이라고 해서 석촌동이라고 불렸다. 1917년경까지 석촌동과 인근에는 많은 무덤들이 남아있었으나, 1970년대 이후 도시개발 등으로 대다수가 파괴되어 고분군의 서쪽 일부만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다. 1980년대까지 진행한 발굴의 결과 대형 돌무지무덤 7기와 널무덤, 독무덤 등 30여기 이상을 확인했다. 그 가운데 3호분은 석촌동 고분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각형 기단식 돌무지무덤으로 한 변의 길이가 50m에 이른다. 1980년대에 이미 상부 구조가 모두 파괴되어 3단까지 밖에 남아있지 않으나 한변의 길이가 30m인 고구려 장군총이 7층인 것으로 보아 3호분도 최소한 5층 이상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3호분에서 금제 장식 조각, 동진제 청자 조각 등이 발견되어 백제 왕릉일 것으로 생각되며, 규모를 보아 백제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강 유역의 백제 돌무지무덤은 대체로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돌무지무덤과 같은 양식으로, 이를 통해 지배세력의 문화계통이 고구려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