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문(四小門)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사대문(四大門)을 제외한 규모가 작은 4개의 소문을 총칭하는 말이다. 숙정문과 흥인지문 사이에 위치한 동북의 혜화문(惠化門, 옛 이름은 홍화문), 흥인지문과 숭례문 사이에 위치한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에 위치했지만 현재는 멸실된 남서의 소의문(昭義門, 옛 이름은 소덕문), 돈의문과 숙정문 사이에 위치한 서북의 창의문(彰義門)이 사소문에 해당한다.
혜화문(惠化門)
혜화문은 1396년(태조 5)에 창건되어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을 오가는 동북관문의 역할을 했다. 속칭 '동소문(東小門)'으로 불렸으며 창건 당시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 1511년(중종 6)에 창경궁 정문의 이름도 '홍화문(弘化門)'이라서 서로 혼동된다는 이유로 '혜화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413년(태종 13)에 북대문인 숙정문이 지맥을 손상시키고 음(陰)의 기운이 강하다는 이유로 폐쇄되면서 사실상 혜화문이 북대문의 역할을 해왔다. 1744년(영조 20) 임진왜란 때 파괴된 문루를 중건하면서 옛 모습을 회복하였으나 1928년에 일제가 수리와 보존이 어렵다는 이유로 문루를 철거해 버렸다. 그리고 1938년에는 간선도로 정비를 명목으로 육축마저 헐어버리면서 완전히 훼철되었다. 이후 1922년부터 1994년까지 본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13m 떨어진 곳에 복원되었다.
광희문(光熙門)
한양도성의 동남쪽에 있는 소문으로 1396년(태조 5)에 완공되었다. '남소문(南小門)'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청계천의 오간수문에서 이어지는 물길이 흘러가는 문이라는 뜻에서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했다. 또한 도성 안의 시체를 밖으로 내보내는 문이라고 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숙종대에 홍예(1711년)와 문루(1719년)가 개축되어 옛 위용을 되찾았지만, 1928년에 문루가 철거된 채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1960년대 퇴계로를 내면서 북쪽 성벽도 철거되었다. 이후 1975년 대대적으로 한양도성 복원공사가 시행될 때, 퇴계로와 왕십리를 잇는 간선도로에 돌출되어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남쪽으로 15m 떨어진 곳에 옮겨 문루까지 복원하였다.
소의문(昭義門)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의 문으로 도성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속칭 '서소문(西小門)'으로 불렸으며, 첫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이었으나 1744년(영조 20) 문루를 개축하면서 '소의문'으로 개칭하였다. 이 문은 광희문과 함께 도성 밖으로 상여를 내보내던 문이었다. 또한 사형수를 처형장으로 끌고 갈 때에도 사용되었는데, 소의문 밖의 넓은 마당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사형 집행장이었다.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절에 많은 천주교 신자가 이 문밖에서 처형당하였기 때문에 '순교자의 문'으로도 불렸다. 오늘날에는 천주교 순교자를 기리는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도로와 철도를 낸다는 명분에 의해 성곽과 함께 훼철되었고, 성문 부재는 경매로 매각되었다.
창의문(彰義門)
창의문은 사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문으로, 2015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북소문(北小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 불렸는데, 인왕산 자락의 계곡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자하문'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한양도성이 축조되던 1396년(태조 5)에 건립되었으며, 양주군과 의주군 방면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1416년(태종 16)에 풍수지리설에 의해 폐문되어 때때로 임시 개방되곤 했다. 임진왜란 때 문루가 소실되었던 것을 1741년(영조 17)에 다시 만들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곳을 통과해 반정에 성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문루 안쪽에는 인조반정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창의문 홍예 앞부분에는 봉황이 조각되어 있고, 천장에도 봉황이 그려져 있다. 속설에는 봉황이 아니라 창의문 밖의 지세가 지네를 닮아 그 천적인 닭을 그린 것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