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은 창덕궁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붙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종묘와 이어져있다. 동쪽에 있는 궁궐이라 하여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고 불렸다. 왕실의 별궁으로 주로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했을 때 규모나 배치 등에서 다른 점이 있다. 우선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공간의 배치도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평지와 언덕에 지었다. 또한 경복궁과 창덕궁이 남향으로 배치된 것과는 달리 정문과 정전이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동쪽이 평지이고 나머지가 구릉이라 이를 거스르지 않고 지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창건
1418년(세종 즉위) 세종이 즉위하자 상왕이 된 태종이 거처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창덕궁 옆에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 이 궁이 바로 창경궁의 시작이었다. 이후 1483년(성종 14)에 성종이 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 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기존의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고 궁의 이름을 '창경궁'이라 고쳐 지었다.
소실과 중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소실되었다. 1616년(광해군 8) 중건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다시 소실되었다.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화재와 보수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830년(순조 30) 대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복구는 1833년(순조 33)에 시작되어 이듬해 4월에 마무리되었다. 따라서 현재 남아있는 창경궁 내전의 전각은 대부분 순조대에 건설된 것이다.
일제에 의한 수난사
1907년 순종이 황위에 오른 후 일제는 창경궁의 전각들을 부수고 그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 등을 함부로 조성하고 일반에게 관람을 허용했다. 1911년(순종 4)에는 궁의 이름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켰다. 이처럼 창경궁은 궁궐로서의 권위를 잃고 공원화되어버렸다. 광복 이후 1983년 10월부터 궁궐 경내에 있던 동물원을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복원 공사를 시작했다. 12월에는 창경원으로 격하되었던 이름을 창경궁으로 회복하고, 일제의 잔재 시설들을 철거하는 한편 본래 궁궐의 모습으로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주요 전각
홍화문(弘化門)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1484년(성종 15)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다. 홍화문 밖에는 넓은 광장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성균관 유생이나 선비들이 상소를 올리거나 시위를 하기도 했다. 또한 국왕이 직접 백성들과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기 전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세금제도의 개편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또한 정조는 1795년(정조 19) 어머니 혜경궁 홍씨(헌경황후)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옥천교(玉川橋)
홍화문을 지나 창경궁 안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다리가 바로 옥천교이다. 1484년(성종 15)에 지어졌으며,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고 해서 옥천교라고 부른다. 응봉산의 명당수가 흐르며, 오늘날까지 다리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다리 양쪽 아래 아치에는 도깨비 얼굴의 귀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귀신을 쫓아내어 궁궐을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명정전(明政殿)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1484년(성종 15)에 지어졌고, ‘명정’은 ‘정사를 밝힌다 ‘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는데, 현재 조선의 5대 궁궐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은 중층 규모이지만 명정전은 단층으로 지어졌다.
문정전(文政殿)
문정전은 편전으로 신하들과 업무를 보고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다. ‘문정’은 ‘문교(文敎)로서 정치를 편다‘라는 뜻이다. 문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대에 다시 지었고, 일제강점기 때 소실되었다가 1986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특히 이곳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경춘전(景春殿)
1483년(성종 15) 성종이 어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를 위해 지은 대비의 침전이다. 이후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인현왕후 민씨(숙종 두 번째 왕비), 헌경황후 홍씨(혜경궁, 정조의 어머니) 등이 이곳에서 생활했다.
환경전(歡慶殿)
주로 왕과 세자 등 왕실 남자들이 생활한 내전 건물이다. 이곳에서 중종과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났다. 환경전은 창경궁이 창건될 때 지어졌다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순조 연간의 대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통명전(通明殿)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이다.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았다. 통명전 서쪽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춘당지(春塘池)
춘당지는 현재 두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원래는 뒤쪽의 작은 연못이 조선시대 때부터 있었던 본래의 춘당지이다. 춘당지에는 내농포라는 논이 있었다. 이곳에서 왕은 직접 농사를 지으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풍년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1909년 일제가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유원지로 만들었다. 이후 1986년 창경궁 복원 때 춘당지 가운데에 섬을 조성하여 우리나라 전통양식에 가깝게 다시 조성하였다.
대온실(大溫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1909년(융희 3)에 완공되었다. 일제는 대한제국 황제인 순종을 창덕궁에 유폐시키고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원과 대온실 등을 지었다. 당시에는 동양 최대 규모의 실내 식물원으로, 철골 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이다. 1907년 후쿠바 햐야토(福羽逸人, 1856~1921)가 설계하고 프랑스인 앙리 마티네(Hanri Martenet)가 시공했다. 준공 당시에는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복원 이후에는 국내 자생 식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2004년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