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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역사와 소개

by 셋째돼지 2025. 5. 22.

서울 종로구 율곡로에 위치한 창덕궁(昌德宮)은 1405년(태종 5)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조성되었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의 지형과 조화를 이루며 건축되었다.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창덕궁
창덕궁

역사

창덕궁은 1405년(태종 5)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된 조선의 궁궐이다. 이미 1394년(태조 3)에 창건한 경복궁이 있었지만, 왕자의 난을 겪고 옹립된 정종(定宗, 1357~1419)은 옛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천도했다.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은 경복궁의 동쪽 향고동에 이궁(移宮)인 창덕궁을 짓고 한양으로 재천도했다. 그리고 개경을 떠나 한양에 도착했을 때 정궁인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두 궁 사이를 오가며 거주하는 양궐체제(兩闕體制)가 빈번하게 있었다. 창덕궁은 1404년(태종 4)에 공사를 시작해 1405년(태종 5)에 완공되었다. 창건 당시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이었다. 완공한 이후에도 증축 공사를 계속하여 1411년(태종 11)에 진선문과 금천교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세웠다. 1406년(태종 6)부터는 후원을 조성했으며, 1418년(태종 18)에는 정전 일대를 개축하는 공사를 단행해 권위있는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을 포함한 경복궁과 창경궁이 소실되었다.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정릉동 행궁에 기거하며 창덕궁의 중건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는 광해군 즉위 후인 1609년(광해군 1)에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창덕궁을 법궁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1623년(인조 원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은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인조는 1647년 재건공사를 시작하고 옥류천 등 후원을 조성했다. 효종대에는 대비전이 마련되었고, 정조대에는 규장각을 세워 왕도정치를 구현했다. 이후로도 꾸준히 증축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의두합과 연경당을 지어 오늘날과 같은 후원이 전해지고 있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이래 정궁은 경복궁이었고,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경운궁(덕수궁)을 황궁으로 삼았다. 1907년 즉위한 순종이 이어하면서 창덕궁이 황궁이 되었다.

창덕궁 소개

돈화문(敦化門)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돈화(敦化)'는 '교화를 돈독하게 한다'라는 뜻이다.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지어졌는데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있어 궁궐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9년(광해군 1)에 재건했는데 규모는 2층 누각형 목조건물이다. 돈화문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궐내각사(闕內各司)

궐내각사는 궁궐 안에 있는 관청으로, 대부분의 관청은 궐 밖에 있지만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이다. 인정전 서쪽 금천교 뒤로 동편에 약방(내의원), 옥당(홍문관),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奉謨堂), 검서청(檢書廳) 등이 있다.

인정전(仁政殿)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 왕의 즉위식이나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궁중 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인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군 2)에 재건,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다음 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인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중층 전각으로 지어졌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이 없어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내부 바닥은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마루는 전등, 커튼, 유리창문 등과 함께 1908년(융희 2)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전 앞마당, 즉 조정(朝廷)은 다른 궁궐의 정전과 같이 박석이 깔려 있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으며 조정에는 품계석을 놓았다.

선정전(宣政殿)

선정전 왕이 신하들과 함께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다. 이곳에서 조정 회의, 업무 보고,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이곳은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朝啓廳)'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라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거쳐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 1647년(인조 25)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光政殿)을 해체하고 그 자재로 선정전을 중건했는데 오늘날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희정당(熙政堂)

희정당의 ‘희정(熙政)’은 ‘화락한 정치’라는 뜻으로, 원래는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침전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편전으로 기능이 바뀐 건물이다. 원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혼전으로 사용되면서,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희정당은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옮겨다 복원하였는데, 이때 내부를 마루와 카펫, 유리 창문,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몄다. 희정당 앞쪽은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의 형태로 되어있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는 구조로 바뀌었다.

 

이외에도 왕비가 살던 대조전, 성정각, 낙선재와 자연 지형을 살려 아름답게 조성된 후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