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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기와의 정의, 종류 및 사료와 최근 발굴

by 셋째돼지 2025. 8. 12.

1. 정의

일반적으로 기와는 토제로 만들지만 청자기와는 청자로 만들었다. 고려시대 청자 기와는 대부분 전남 강진 청자요지에서 생산했다. 전북 부안 유천리에서도 사당리 출토 청자기와와 동일한 형태와 문양의 청자기와가 생산되었다. 청자기와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건물의 규모와 지붕의 면적을 정확하게 산출해야 한다. 또한 청자기와가 완성되었을 때 수축하는 비율과 무게까지 미리 계산해 크기를 규격화해야 한다. 이처럼 청자기와는 고려시대 최고의 자기 제작기술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청자 모란무늬 수막새
청자 모란무늬 수막새,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2. 종류

기와는 지붕에 놓이는 위치에 따라 수키와와 암키와, 막새기와, 서까래기와, 마루기와, 특수기와 등으로 구분된다. 수키와와 암키와는 지붕 대부분의 면적에 놓이기 때문에 가장 많이 제작된다. 조선시대에는 가장 많이 쓰는 보통의 기와라 하여 '상와(常瓦)'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붕의 처마 끝과 모서리에 놓이는 기와는 막새기와이다. '와당(瓦當)', '방초(防草)', '당와(唐瓦)'라고 한다. 형태에 따라 수막새[夫防草]와 암막새[女防草]로 세분할 수 있다. 수막새는 지붕의 기왓등 맨 아래에 놓인다. 고려시대 청자기와로 발견된 것은 수키와와 암키와가 있고, 막새기와로 수막새, 암막새, 모서리기와, 이형(異形)막새가 있다. 마루기와에는 암마룻장기와인 적와(積瓦), 부고, 곡와(曲瓦), 잡상(雜像) 등이 출토되었다.

3. 청자기와가 기록된 사료

『고려사(高麗史)』 1157 4 1일의 기사에는 의종(毅宗)이 본궐 동쪽에 지은 수덕궁(壽德宮) 안에 있는 양이정(養怡亭)이라는 정자의 지붕을 청자로 덮었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최근에는 강진 사당리에서 ‘태평[大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자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는 양이정이 있던 수덕궁 내에 태평정(太平亭)이라는 정자에도 청자기와가 사용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여름 4월 병신 초하루 대궐 동쪽의 이궁(離宮)이 완성되자 궁호를 ‘수덕(壽德)’이라 하고 전호(殿號)는 ‘천녕(天寧)’이라 하였다. 또 시중(侍中) 왕충(王冲)의 집을 안창궁(安昌宮)으로, 전 참정(參政) 김정순(金正純)의 집을 정화궁(靜和宮)으로, 평장사(平章事) 유필(庾弼)의 집을 연창궁(連昌宮)으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김거공(金巨公)의 집을 서풍궁(瑞豊宮)으로 삼았다. 또 민가를 50여 채를 헐어서 태평정(大平亭)을 짓고 태자에게 명해 편액(扁額)을 쓰게 하였다. 그 곁으로 유명한 꽃나무와 기이한 과실나무를 심었으며, 진기하고 아름다운 장식물을 좌우에 늘어놓았다. 정자의 남쪽에는 못을 파서 관란정(觀瀾亭)을 지었으며, 그 북쪽에 지은 양이정(養怡亭)은 청자(靑瓷)로 지붕을 덮었고, 남쪽의 양화정(養和亭)은 종려나무로 지붕을 덮었다. 또 옥석(玉石)을 연마해 환희(歡喜)와 미성(美成) 두 대(臺)를 쌓고는 괴석(怪石)을 모아 신선산을 만들고 멀리서 물을 끌어와 비천(飛泉)을 만들었는데 온갖 사치를 다해 화려하게 하였다. 여러 소인배들은 이를 맞추기 위해 민간의 진귀한 물건을 자주 밀지(密旨)라 칭하면서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고 다투어 빼앗아 실어 날랐는데 짐수레가 길에 끊이지 않으니 백성들은 이를 매우 고통스러워하였다.
『고려사(高麗史)』 1157 4 1

4. 최근 발굴

최근 2019년 강진 사당리 '가'구역 발굴조사에서 '대평(大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자와가 온전한 상태로 출토되는 매우 중요한 성과가 있었다. '대평'은 양이정과 함께 개성의 수덕궁 내에 있었던 태평정을 말하는 것이다. 외면에는 모란당초문과 뇌문을 음각한 부곡와(夫曲瓦)이다.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 지붕의 맨 꼭대기에 놓이는 기와로 토제와는 물론 청자기와로도 처음 출토되는 형태이다. 기와 대면에는 '대평(大平)'이 크게 음각되어 있다. 

청자 모란무늬 '大平'명 곡와
청자 모란무늬 '大平'명 곡와, 고려 12세기, 길이 46.5㎝, 폭 8.3~9.0㎝, 두께 0.9㎝, 강진 사당리 '가'구역 출토, 민족문화유산연구원, 출처:고려청자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