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제 침통은 선덕여왕 3년(634년)에 건립된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출토된 은제 침통이다. 얇은 은판을 말아 원통형 용기를 만들고 표면 전체에 초록색 유리를 녹여 붙였다. 뚜껑과 몸체 상단 측면에 각각 고리가 있어 끈으로 연결했을 것으로 보인다. 바늘귀가 있는 금은제 바늘이 각각 1점씩 함께 발견되었다. 경주 금관총 출토 금제 허리띠의 드리개 장식에서도 육각의 통형 침통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뚜껑이 없어 실용성보다는 일종의 꾸미개로 폐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북방 유목민족이 평소 즐겨 사용하는 물건들을 허리띠에 매달고 다니던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경문왕 9년(869)의 기록에서도 금침통과 은침통을 당나라에 보낸 기록이 있다. ‘슬슬전(瑟瑟鈿) 금침통’은 푸른색 보석을 감입한 금침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11 新羅本紀 第11 景文王 9年(869) 秋7月
9년(869) 가을 7월에 왕자인 소판(蘇判) 김윤(金胤) 등을 당나라에 보내 은혜에 감사하였다. … 보석을 박아 넣은 금 바늘통 30구(具), 금꽃을 새긴 은 바늘통 30구, 바늘 1,500개 등을 받들어 진상하였다.
九年, 秋七月, 遣王子蘇判金胤等, 入唐謝恩兼進奉馬二匹 … 瑟瑟鈿金針筒三十具·金花銀針筒三十具·針一千五百.
2. 고려
침통은 바늘을 넣어 보관하는 용기로, 관(管)처럼 생긴 길쭉한 원통 모양이다. 고려시대 침통은 몸체를 긴 뚜껑 안으로 끼워서 닫는 구조이다. 일반적으로 뚜껑이 전체 침통 길이의 약 4/5 정도로 긴데, 이는 뚜껑과 몸체가 쉽게 분리되면 바늘을 분실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몸체는 바늘을 보관하는 길쭉한 관 부분과 뚜껑을 열었을 때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부분으로 나뉜다. 바늘을 보관하는 관 외면에는 죽절형의 돌대가 있다. 이는 바느질을 하고 남은 실을 감아 보관하는 실패 역할을 했다. 또한 뚜껑과 몸체를 밀착시켜 뚜껑이 쉽게 열리지 않도록 했다. 이처럼 고려시대 침통은 다양한 기능성과 장식성을 고려해 세심하게 제작되었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오구라컬렉션의 고려시대 침통 안에는 귀가 달린 바늘이 들어 있다고 소개된 바 있다. 또한 1939년 전라남도 장흥군 모산리의 한 고분에서 고려시대 상류층 여성의 장렴(粧奩)이 출토되었다. 장렴은 화장용 도구 등을 담았던 것으로, 출토 당시 상자 안에는 청동 거울, 청자 상감국화문 유병, 청자 상감국화문 합들과 은제 침통 등이 들어 있었다. 여기에 침통이 담겨 있었다는 것은 부녀자들이 평소에 소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 침통은 패용을 위한 고리나 구멍이 없다. 따라서 고려의 침통은 부녀자들이 침선용 바늘을 넣어두는 용도로 사용한 기물이라고 파악된다.
3. 조선
조선시대 침통은 긴 통형의 몸체에 작은 뚜껑을 덮는 형식이 다수이다. 이러한 침통들은 주로 의료용 침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어, 고려의 침선용 침통과는 용도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