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때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의 침략을 막아 내고자 1236년부터 1251년까지 약 16년에 걸쳐 불교 경전의 내용을 목판에 새긴 것이다. 대장경은 경(經:붓다의 말씀)·율(律:불교의 여러가지 규칙과 의식)·논(論:후대의 해설서)의 삼장(三藏)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는 당시 고려인들의 불심과 기술이 결합된 결과물로서 현존하는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완본(完本)으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적 배경
10세기말부터 11세기 초반까지 고려는 거란과 3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렀다. 그 가운데 2차 전쟁이 발발한 1011년(현종 2)에는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대장경을 조성했는데, 이를 초조대장경이라고 한다. 이는 고려에서 처음으로 제작한 대장경이라는 의미이다. 초조대장경은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1232년(고종 19) 몽골의 2차 침입 때 소실되었다. 이규보는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서 과거 (초조)대장경을 만든 덕분에 거란의 군대가 물러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대장경이 소실되었으니,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다시 대장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불심(佛心)이 깊은 고려인들은 대장경을 통해 여러 불보살의 도움과 보호를 받아 외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결과 팔만대장경은 불교계는 물론 국왕을 비롯한 모든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대규모 국가사업으로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국가적인 단결과 정신력 고취에 기여하였다.
팔만대장경의 제작 과정
1232년(고종 19)에 몽골군이 개경까지 침입해 오자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그리고 1236년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와 남해(南海)에 각각 대장도감(大藏都監)과 분사도감(分司都監)을 설치해 대장경을 조판했다. 팔만대장경의 제작 과정은 약 16년이 걸린 대규모 국가사업으로 다음과 같이 몇 단계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초조대장경 인경본, 송의 개보장, 요의 거란장 등 여러 판본들을 수집한다. 학승과 지식인 등이 수집한 저본을 토대로 대장경의 비문이나 오탈자, 문맥에 맞지 않고 필요 없는 내용 등을 바로 잡는다. 그리고 최종으로 어떤 경전을 대장경에 포함시킬지를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수집한 판본들을 비교 검토하여『고려국신조대장경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經校正別綠)』30권을 만들었다. 줄여서 『교정별록』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는 이 자료를 통해 팔만대장경이 얼마나 정확도가 높은 대장경인지 알 수 있다.
경판을 만들기에 적합한 나무를 선정해 벌목한다. 팔만대장경판의 재질은 64% 이상이 산벚나무이고 14%가 돌배나무, 그 나머지는 후박나무와 단풍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벌목한 나무는 썩거나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 바닷물에 담그거나 소금물에 삶고 찌는 과정을 거쳐 바람에 자연 건조한다. 자연 건조한 나무를 규격에 맞게 다듬어 목판으로 사용하기 적당하게 손질한다. 경판 한 장의 평균 크기는 두께 약 2.8cm, 가로 70cm, 세로 24cm이며, 무게는 약 3.25kg이다.
완성된 경전의 원고를 한지 위에 옮겨 쓴다. 이때 참여한 필사자들은 모두 일정한 서체로 글자를 썼다. 그리고 완성된 원본을 경판에 뒤집어 붙인 뒤 최소 1,800명 이상의 숙련된 판각공이 팔만대장경 각각의 목판에 글자를 조각했다. 팔만대장경의 판수는 약 81,258매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팔만대장경을 땅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리면 약 3200m로 이는 한라산(1950m)이나 백두산(2744m) 보다 높다. 경판의 한 면에는 세로로 23행, 한 행에는 14자씩 새겼으므로, 글자 수는 면당 320여 자씩이다. 그리고 경판 앞뒤 양면에 새겼으므로 경판 한 장에는 약 640여 자가 들어있다. 따라서 전체 글자 수는 약 5,200만 자에 달한다. 이는 500년 조선왕조의 기록유산인 『 조선왕조실록 』 의 전체 글자 수가 5,400만 자 전후인 점과 비교해봐도 당시 전쟁 중에 완성한 팔만대장경이 얼마나 큰 정성을 들여 제작했는지 알 수 있다.
글자를 다 새기면 경판의 표면에 진한 먹을 발라 결을 메워 매끄럽게 한 다음 다시 생옻을 두 세 차례 덧칠했다. 경판의 양쪽 끝에는 각목으로 마구리를 대고 순도 99.6% 이상의 구리판으로 네 귀퉁이를 감싸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마감했다. 그 결과 대장경판은 지금까지도 좀먹거나 뒤틀림 없이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목판이 완성되면 경전을 한지에 찍어내 인쇄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오탈자 등을 찾아 수정했다.
마침내 1251년(고종 38)에 대장경이 완성되었다. 『고려사』에는 선원사 대장경판당에서 국왕과 신하들이 참여한 가운데 대장경의 낙성 의식이 거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완성된 팔만대장경은 역대 모든 대장경 가운데 가장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세 동아시아에서 대장경은 그 나라의 불교의 수준과 문화적인 역량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특히 팔만대장경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부처님의 보호를 염원하며 몽골군을 물리치고자 한 고려사람들의 정신적, 종교적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방어 수단이었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팔만대장경의 가치
팔만대장경은 현재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경판의 수가 무려 81,258매에 달해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초조대장경을 다시 새겼다는 의미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이라고 하기도 한다. 경판은 국보 32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2007년)으로 등재되었으며,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52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1995년)으로 등재되었다. 이처럼 팔만대장경이 국보뿐만 아니라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그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