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양도성은 조선왕조의 수도인 한양(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세계의 여러 도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또한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그 형태와 기능을 유지한 문화유산이다. 한양도성에는 8개의 성문(城門)과 2개의 수문(水門), 6개의 치(雉), 2군에의 곡성(曲城), 봉수대(烽燧臺) 등의 시설이 있다.
한양도성의 건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8월에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했다. 궁궐과 종묘, 사직 등을 차례로 완성한 태조는 수도를 효과적으로 방위하기 위해 1396년(태조 4)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이듬해부터 도성 축조에 착수했다.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백악(북악산), 낙산(낙타), 남산(목멱), 인왕산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쌓아 평지 부분까지 연결했는데 산지는 석성, 평지는 토성으로 쌓았다. 총 59,500척(18.6km)에 이르는 도성을 쌓기 위해 전국에서 약 20만 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다. 2차에 걸친 총 98일의 대대적인 공사로 사대문(四大門), 사소문(四小門)과 이를 잇는 성벽이 완성되었다.
1422년 세종 때에는 32만명의 백성을 동원해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기존의 토성을 모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공사는 철저한 구간별 책임제였다. 천자문의 순서대로 전체를 97구간으로 나누고 각각 담당 군현을 정하여 축성과 함께 사후 보수까지 책임지게 했다. 책임제의 흔적은 구간명, 담당 군(郡), 현(縣)을 새겨 놓은 성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노후화된 도성은 대대적인 보수가 필요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에 계속된 전란으로 국방의식이 고조되고 한양으로 지방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도성 수비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에 숙종은 도성 수축을 결정하고, 1704년 공사에 착수하였다. 도성수비인 오군영(五軍營)을 동원해 공사를 진행했는데 공사 시기, 담당 군영명, 공사 책임자, 공사 감독자 등을 새겨 책임의 소재를 정확히 밝혔다. 돌의 크기와 쌓는 방법도 변화하였다. 기존의 성돌은 작아서 잘 무너졌기 때문에 가로, 세로가 40~45㎝의 규격화된 방형 석재를 이용하여 더욱 견고하게 쌓았다. 이와 함께 1711년(숙종 37) 탕춘대성의 축성을 시작하는 등 도성 외곽의 방어를 강화하고자 노력하였다.
수난과 복원
한양도성은 조선의 역대 왕들의 각별한 관심 아래 여러 차례 정비되면서 원형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전차 선로가 개설되면서 성벽과 성문은 제 기능을 잃기 시작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한 직후 일본의 압력으로 성벽처리위원회(城壁處理委員會)가 설치되었다. 그 결과 숭례문의 북측 성벽이 철거되었다. 이때부터 한양도성의 원형은 급격하게 훼손되었다. 일제는 근대화라는 명목 아래 한양을 식민통치에 적합한 형태로 개조하고자 했다. 도로와 전차 노선을 확장하면서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성문과 주변의 성벽들을 집중적으로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소의문(1914년), 돈의문(1915년), 혜화문(1938년)이 철거되었고, 한양도성의 서쪽(숭례문~돈의문), 동쪽(흥인지문~장충동) 성벽이 훼철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서울은 6.25 전쟁을 거치며 폐허가 되었다. 주요 시설들이 파괴되었고 도성의 정문이었던 숭례문도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해를 입었다. 이후 서울의 재건을 위한 개발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도로, 주택, 공공 건물, 학교 등이 건립되었고 이 과정에서 도성이 훼손되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복원 사업이 시작되어, 1975년부터 1982년까지 8개 지구에서 광희문과 숙정문을 포함한 9.8km의 성벽이 복원되었다. 2000년대에는 청계천 복원 사업을 시작으로, 도성 복원 및 보수 사업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그 결과 동대문운동장, 남산(목멱) 회현자락 등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생각했던 땅 아래에서 이간수문과 성벽이 발견되었다. 현재 한양도성은 전체의 70%인 총 13.370m(2014년 기준) 구간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