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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의 설치와 국제무역의 중심지 개요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에 위치한 청해진(淸海鎭) 유적은 통일신라시대의 해상 군사기지이자 당대 동아시아 국제 무역의 거점이었다. 흥덕왕 시기에 해적이 들끓자 828년(흥덕왕 3)에 당(唐)에서 귀국한 장보고(張保皐)가 왕의 허락을 받아 설치했다.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하는 임무를 완수하고 청해진을 거점 삼아 당·신라·일본을 연결하는 국제무역을 주도했다.설치9세기 초 신라의 해안에는 해적들이 빈번하게 출몰했다. 해적들은 당을 오가는 무역선과 신라의 조운선을 약탈하고 서남해 지역을 습격했다. 또한 신라인들을 납치해 당나라 각지에 팔아 넘기기도 했다. 이러한 해적들의 출몰로 백성들은 생존에 위협을 받았고, 국가 재정은 악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신라 조정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 해적을 소탕할 능력이 없었다.. 2025. 6. 18.
불국사 창건과 가람배치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吐含山) 자락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김대성(金大城)이 발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국사는 여러 부처와 보살들을 각각 모신 구조로 크게 대웅전(大雄殿), 극락전(極樂殿), 비로전(毘盧殿), 관음전(觀音殿)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목조 불전들은 인공적으로 쌓은 석조 기단 위에 지어졌는데 이는 부처님의 세계인 불국토를 형상화한것이다. 이처럼 불국사는 당시 신라인들이 꿈꾸던 불국토가 이상적으로 구현된 공간으로 동북아시아 고대 불교예술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창건과 중수일반적으로 불국사는 김대성이 발원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성은 745년(경덕왕 4)~750년(경덕왕 9)에 중시(中侍.. 2025. 6. 12.
경희궁(조선후기~19세기 중엽 이후의 역사) 경희궁(慶熙宮)이 있었던 자리는 원래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이 살았던 곳이다. 그런데 광해군이 인왕산 자락에 인경궁을 짓기 시작할 무렵 정원군의 집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터를 몰수하고 경희궁을 지었다.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되었다.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1760년(영조 36)에 원종의 시호인 ‘공량경덕 인헌정목 장효대왕(恭良敬德 仁憲靖穆 章孝大王)’의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하여 경희궁으로 바꿨다.조선후기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훼손된 창덕궁을 정비하고 창경궁을 건설했다. 또한 1617년(광해군 9) 1월부터는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건설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술인(術人) 김일룡(金馹龍)이.. 2025. 6. 9.
덕수궁_조선후기와 대한제국시기 덕수궁(德壽宮)의 옛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경운궁은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황궁(皇宮)이 되어 대한제국의 중심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1907년(광무 11)에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어 경운궁에 갇혀 생활하게 되면서 덕수궁으로 개칭되었다. 덕수궁은 일본과 세계열강들의 위협 속에서 나라를 지키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한 역사적인 장소이다.조선후기경운궁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로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던 곳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궐들이 모두 불에 타버리자 1593년(선조 26)부터 임시 궁궐로 사용되어 정릉동 행궁(行宮)으로 불렸다. 경운궁이 있던 정릉동은 많은 종실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선조가 장기간 체류하면서 점차 인접한 종친들의 집을 수.. 2025. 6. 7.
창경궁의 역사와 주요 전각 정리 창경궁은 창덕궁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붙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종묘와 이어져있다. 동쪽에 있는 궁궐이라 하여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고 불렸다. 왕실의 별궁으로 주로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했을 때 규모나 배치 등에서 다른 점이 있다. 우선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공간의 배치도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평지와 언덕에 지었다. 또한 경복궁과 창덕궁이 남향으로 배치된 것과는 달리 정문과 정전이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동쪽이 평지이고 나머지가 구릉이라 이를 거스르지 않고 지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창건1418년(세종 즉위) 세종이 즉위하자 상왕이 된 태종이 거처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창덕궁 옆에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 이 궁이 바로 창경궁.. 2025. 6. 5.
서울 사소문의 종류 사소문(四小門)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사대문(四大門)을 제외한 규모가 작은 4개의 소문을 총칭하는 말이다. 숙정문과 흥인지문 사이에 위치한 동북의 혜화문(惠化門, 옛 이름은 홍화문), 흥인지문과 숭례문 사이에 위치한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에 위치했지만 현재는 멸실된 남서의 소의문(昭義門, 옛 이름은 소덕문), 돈의문과 숙정문 사이에 위치한 서북의 창의문(彰義門)이 사소문에 해당한다. 혜화문(惠化門)혜화문은 1396년(태조 5)에 창건되어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을 오가는 동북관문의 역할을 했다. 속칭 '동소문(東小門)'으로 불렸으며 창건 당시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 1511년(중종 6)에 창경궁 정문의 이름도 '홍화문(弘化門)'이라서 서로 혼동된다는 이유로 '혜화문'으로 .. 2025. 6. 3.